When the Evening is a Deep Blue
Lee Chan-woong, “When the Evening is a Deep Blue: A Map of Contemporary French Aesthetics”, Ehaksa (2023)
이찬웅, “야청빛 저녁이면: 프랑스 현대 미학의 지도”, 이학사 (2023)


The Black Pool II
검은 웅덩이 II
2019, oil on canvas, 46x53cm.
The Black Pool III
검은 웅덩이 III
2019, oil on canvas, 46x53cm.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일대는 한국 근현대사의 고통스러운 상처들이 중첩되어 있는 곳이다. 남아 있는 기록과 유적만 돌아봐도 조선 후기, 일제강점기, 해방기, 군사독재 시기, 어느 시기 하나 건너뛰지 않고 무참하고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졌다. 이곳은 제주 섬이라는 차별받은 지역 안에서도 다시 차별받은 곳이라서 아마도 우리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곳일 것이다. 방문객은 단지 몇 글자 적혀 있는 안내판에 기대어 상상할 뿐이지만, 그 상상에서조차 지난 비극적 사건들이 불러일으키는 어두움은 화창한 남쪽 날씨와 대비를 이루어서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한반도를 하나의 인체로 본다면 이곳은 찔리고 베고 쓸리고 다시 긁힌 통에 이제는 아물 수 없는 상처들이 숱하게 나 있는 부위이다. 이 작품은 자연의 피부에 나 있는 역사적 상처를 그린 것이다. 짐작하기로는 섯알오름학살터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 같다. 옅은 회색부터 짙은 검은색까지 소묘하듯이 유화로 세밀하게 그리면서 작가는 자신의 테크닉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의미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흰색 부분이다. 가상의 연기가 흰색으로 퍼져 올라오고 있는데, 아마도 작가는 과거로부터 오는 불과 연기를 환각처럼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팻말은 흰색으로 지워져 있다. 이 흰색 부분은 우리의 지각이 차단당하고 기록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 작품은 여전히 기억되지 않고 기록되지 않은 다른 사건들의 존재를 증언한다. (pp. 286-287.)
©2024 Kang Youje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