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라지고 돌아오는 것들: 회화의 소묘적 리듬-하기 (2022)
추성아

강유정은 꽤 오랫동안 풍경을 그려왔다. 작가가 다뤄왔던 특정 장소들은 역사적으로 상처가 깊이 자리한 곳이지만, 실재했던 상황에 주목하지 않고 건조한 방식으로 풍경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작가가 담아내는 풍경은 시간이 중첩되어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이들에게 쉽게 잊혀지는 일종의 반복되는 역사의 굴레 혹은 습관이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사건들은 그 자리에 어떤 형태로든 제 자리를 찾는다. 작가는 사건들의 사실을 들춰내지 않고 날카로웠던 상처와 사건들이 아물고 그 위에 다른 시간들이 올려져 현재의 풍경을 이룬 모양새에 주목한다. 예컨대, 섬세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재현의 방식은 작가에게 한 장소가 정치적 발언의 대상이 아닌 보다 복합적인 감각에 대한 것이다. 사건들의 집합체에서 어떤 것은 남고, 어떤 것은 사라지는 그 틈에 대한 반복 즉, 순환적인 흐름과 질서에 대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세월이 자연스레 잊혀 지도록 씻겨 내려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있듯이, 풍경과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자연스러운 패턴들이 만들어지고 보편적인 사유들이 자리잡는다. 유동적인 상황 안에 어떤 질서들이 채워지는 삶의 이치(理致)같은 맥락으로 보자면, 작가는 아픔이 전제된 장소들 혹은 보편적인 풍경에 매료되어 역설적으로, 보편적인 연결 고리를 상징하는 특정 풍경에서 의미를 발견하려 하고 반복적인 기록의 그리기의 태도를 취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근래에 작가가 반복적으로 화폭에 담는 물과 불은 바다의 질감과 낙하하는 불, 그리고 윤슬로 구체화되어 오랫동안 관심을 두었던 자연의 순환과 리듬에 대한 이미지를 지속한다. 물과 불이 갖고 있는 속성상 빛과 명암, 그림자, 파동, 폭발의 순간들은 작가에게 채화된 일상의 리듬에서 출발한다. 해가 진 다음 어슴푸레하게 윤곽만 보이고 빛의 감각만 감지할 수 있는 밤 풍경을 매일같이 마주하는 작가의 생활 패턴은 자연스럽게 비물질의 운동적인 요소에 눈길을 주며 상징적인 지점들을 발견하려 한다. 그의 회화에서 크게 두 가지 소재를 반복적으로 끌어오는 것은 낙하하거나 터지는 불꽃 혹은 물의 표면에 반사된 빛이다. 이전 작업들이 대체로 원경을 그려냈다면 근작은 근경의 한 장면에 집중하여 대상의 운동성과 질감을 부각시킨다. 이번 전시에서는 전시 제목이 <에스키스 심포니(Esquisse Symphony)>이듯, ‘에스키스’의 개념과 태도, 그리고 리듬과 조화를 포괄하는 ‘심포니’가 특정 원소의 운동성과 질감을 구현하는데 페인터의 태도로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의 초벌이기도 한 소묘 혹은 스케치라고 일컫는 에스키스는 완성된 그림의 밑그림에 해당되고 그린다는 행위를 아우른다. 완성된 작업과 연계되는 일종의 연작 개념에 수렴되는 이 개념은 드로잉과 다르게 그 자체로 독립성을 갖기보다 최종본의 연속선상에 놓이게 된다. 이렇듯, 강유정의 회화는 완결된 형태를 위한 별도의 에스키스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 준비 단계를 거치면서 과정 속에서 나아가는 방향을 터득하고 그리기의 행위에 대한 리듬을 찾는 과정이 빠르게 작업의 완성에 반영된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에스키스는 철저하게 준비 단계를 거치는 경우에 참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분리되어 캔버스로 옮겨올 때의 어떤 안정감을 주는 반면에, 강유정이 실천하는 회화는 물감이 채 마르기 전에 빠르게 그 위를 그려내면서 밑색과 자연스럽게 섞이고, 붓으로 그러내는 그리기의 제스처가 대상의 질감과 리듬감을 가능하게 만드는 쪽에 가깝다. 이와 더불어, 사물을 직접 관찰하거나 기억을 더듬어가며 간략하게 그려내는 에스키스의 특징은 보편적으로 완성이 아닌,작가의 사유를 거칠게 기록하는 태도도 담고 있어 간단히 구도나 색채, 그리고 명암을 그려보기도 하면서 미리 파악하는 세부적인 선택의 과정들이 포함된다.이는 전반적인 작가의 회화가 물감을 두껍게 쌓지 않고 마치, 연필로 흐리게 소묘하듯이 그린 듯한 인상을 주는 붓질과 우리가 소묘할 때 가장 도드라진 부분을 지우개로 지우거나 가장 어둡게 그려야 하는 방식처럼, 핵심적인 부분들을 군더더기 없이 채색하는 등 굉장히 얇게 표면을 구사하는 방식과의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예로, <Things We Lost in the Fires>(2022)와 <The Blue Sequence>(2022)는 마치 색지 위에 그린 것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는데, 흰색으로 밑칠한 상태에서 안료 입자를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마르지 않은 화면을 유지하면서 붓질이 바로 개입된다. 물감의 점성보다 연필처럼 얇은 선과 유사한 붓질은 특정 순간에 연필로 그렸을 때의 느낌과 유사하게 가져가면서도 연필로 표현할 수 없는 물감의 뒤섞임이 주는 질감이 드러난다. 이같이 강유정은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소묘적인 리듬에 빗대어 핵심적인 요소를 지속적으로 끌고 간다.

다시 풍경의 시간들로 돌아 오자면, 보이지 않는 상처의 기억과 애도의 물결은 장소의 지형에 끊임없는 침식과 풍화를 주어 관념적으로 변하면서, 현재도 그 모양새가 달라진다. 이러한 장소적 풍경의 속성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상은 늘 유동적이며 변화하는 주기에 리듬이 부여된다. 여기서 리듬감과 삶의 순환을 매개하는 역할에 물과 불이라는 자연적인 요소로 주목하는 작가의 관심은 페인팅의 방식과 이어진다. 강유정은 이번 전시에서 슬픔 자체에 주목하지 않고 보다 근원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순환의 고리를 음악적인 요소로부터 참조한다. 특히, 작가가 언급한 ‘소묘적 리듬’은 드뷔시의 교향적 스케치인 <바다(La Mer): 관현악을 위한 3개의 교향적 소묘>에서 영감을 받았다. 세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바다 위의 새벽부터 정오까지 바다의 시간성을 풀어내고 파도와 바람 등 바다와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를 사유하는 이 곡은 풍경을 객관적 외부가 되어 내적으로 흡수해 재구성된다. 이같은 태도는 작가가 바다 회화를 지속하는 것과 드뷔시의 음악적 인상주의를 감각하는 공통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교향적 스케치’라는 주석이 표제에 달린 이 곡은 드뷔시가 바다를 스케치 즉, 에스키스하는 미묘한 시간의 변화를 그린 것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바라보고 경험하는 바다의 시간에 비하면 물리적인 법칙을 떠나 주체적 인상 속에서 유연하게 흘러간다. 이렇듯, 축적된 기억들이 수평선 위에 펼쳐 놓고, 음악적 균형과 리듬을 찾으려고 했던 음악가의 태도처럼 강유정은 페인터로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에 집중하여 소묘적 그리기의 태도로 구현한다.
이같이, 풍경이 부서지고 흩어져 그 잔해가 남는 모양과 방향을 담는 연작을 지속하는 작가는 의식을 행하듯이 그리기의 태도를 반복한다. 의식이라는 행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Things We Lost in the Fires>, <Always and Forever>(2022), <Sparkler>(2021) 등에서 등장하는 불꽃처럼, 생성과 파괴 그리고 생명으로의 전환을 내포하고 대상을 기리는 들불 축제의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폭발하는 순간의 에너지와 동시에 타 들어가는 불꽃 속에 존재했던 것이 소멸되고 공기 중으로 휘발되는 연기처럼, 우리는 무언가를 끝없이 잃어버리고 다른 형태로 돌아와 얻는 어떤 삶의 이치 같은 것이지 않을까 싶다. 인간사에 담긴 염원에 대한 유사한 태도는 샤머니즘적인 속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역사, 전통으로 자리잡은 의식 자체가 곧 자기 치유 혹은 공유하는 공통 언어일 것이다. 강유정에게는 이같은 태도가 오랫동안 보편적인 풍경을 기록하는 형태로 이어오면서 점차, 그리기의 제스처에 집중하게 되므로 스스로의 회화적 리듬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풍경의 상처, 상처의 풍경 (2021)
고충환

흑백. 작가의 그림에서 인상적인 것은 흑백 모노 톤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점이다. 그렇게 그림은 보기에 따라서 수묵화처럼 보이고, 목탄화처럼도 보인다. 무채색의 풍경을 매개로 키아로스쿠로 곧 명암을 대비시켜 사물 대상의 세부를 표현하는 전통적 기법에 대한 형식실험을 꾀하고 있는 것. 여기에는 그저 형식실험 이상의 의미가 있다. 굳이 채색이 없이도 사물 대상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고, 이보다는 채색화와는 다른, 어쩌면 혹 채색화가 간과하고 있을지도 모를 어떤 것, 이를테면 흑백 모노 톤 고유의 분위기 혹은 본성이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게 뭔가. 흑백으로 그린 작가의 그림은 관념적으로 보이고 내면적으로 보인다. 낯설게 보이고 이질적으로 보인다. 문명에 추방된 자연이 되돌아오는 시간, 그렇게 귀환한 자연이 낯선 타자를 밀어 올리는 시간, 밤과 어둠의 시간 그러므로 어쩌면 영적 시간 고유의 아우라가 살아 숨 쉬는 것 같다(아우라에는 분위기와 함께 숨이라는 의미도 있다). 때로 그림은 빛바랜 흑백사진처럼도 보이는데, 역사를 소환하고 기억을 환기하는 주제 의식에도 부합하는 면이 있다. 그렇게 작가는 채색이 없어서 오히려 더 오롯한, 빛과 어둠이 대비되거나 몸을 섞는 현상학적 풍경을 그린다.
흙, 물, 불, 공기. 수면에 불꽃이 일렁인다(물과 불). 들풀을 태우며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번져나간다(흙과 불). 그 뒤편으로 연기가 피어오른다(공기).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며 폭죽이 터지고, 그렇게 튄 불티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불과 공기). 그 잔해 중 일부가 수면 위로 낙하한다(다시, 물과 불). 그렇게 매번 되돌아오는 폭력적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역사를 소환한 작가는, 그리고 야경을 매개로 풍경의 이면 그러므로 풍경의 타자를 불러낸 작가는 근작에서 그 서사, 이를테면 역사적 서사, 밤의 서사 그러므로 어둠의 서사에 등장하는 원소 자체에, 현상 자체에, 질료 자체에 주목한다. 서사로부터 서사의 구성물질 쪽으로 주제 의식의 축이 옮겨왔다고 해야 할까. 거시적 관점에서 미시적 관점으로 무게중심이 옮아왔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어쩌면 주제 의식의 자연스러운 진화과정으로도 보이는, 그러므로 상호 유기적인 관계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이는 그 관점에 붙잡힌 물질 그러므로 원소가 흙, 물, 불, 공기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흙, 물, 불, 공기는 그로부터 세계가 유래한 기원물질이며 최초의 원소로 알려져 있다. 이런 기원물질에 대한 신화는 동서가 다르지 않은데, 존재가 유래한 원형적 이미지에 끌린다는 점에서 향후 작가의 그림이 존재론으로 열리는, 그리고 그렇게 존재의 원형적 이미지를 파고드는 경우를 예감해봐도 좋을 것이다. 
신화. 신화는 이야기다. 이야기들의 이야기다. 모든 이야기가 그로부터 파생되었을 이야기들의 원형 그러므로 원형적 이야기다. 그 원형적 이야기 속에 원형적 이미지가 간직돼 있다(칼 융의 원형). 그리고 원형적 물질이 간직돼 있다(가스통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 삶과 죽음이 순환하는 이유가, 존재가 존재하는 이유가 보존돼 있다. 어떻게 삶이 죽음의 일부이며 죽음이 삶의 부분일 수 있는지, 물질이 어떻게 정신이 되고 또한 정신이 어떻게 물질로 환원되는지에 대한 답이 기다리고 있다. 정신의 논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질도 논리를 가지고 있다(질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 그렇게 오직 물질 그러므로 몸으로서만 얻을 수 있는 답이다. 진즉에 작가가 풍경의 반쪽인 밤을 그리고, 칠흑 같은 바다 건너편에 섬광(아니면 무슨 계시)처럼 빛나는 하얀 수평선을 그리고, 포말을 하얀 거품으로 토해내는 검은 수면을 그리고, 찰나적인 빛으로 어둠 속으로 죽는 폭죽을 그린 이유가 따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향후 작가가 혹 물질을 매개로, 물질(그러므로 어쩌면 감각)을 넘어 어둠 자체를 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도 된다.

The Painting of Kang You Jeong ‘Scar of Landscape, Landscape of Scar’
Koh, Choong-whan

Black and white. The impressive point is that she paints in monotone of black and white. So the paintings look like ink and wash painting or charcoal. She intended to experiment with forms of traditional method that depicts the details of the object-thing through the contrast of chiaroscuro, light and darkness, by medium of achromatic landscape. This effort has more meaning than just a formal experiment. One point is to prove that the object-thing can be adequately expressed without coloring, and another point is that there may be a unique at- mosphere or nature of monotone of black and white, which is distinguished from colored painting, or which the colored painting may have overlooked. What would it be? Her black and white painting looks conceptual and internal. Unfamiliar and disparate. There seems to breathe the aura of the time when the nature expelled by civilization returns, the time when such returned nature pushes up the strange other, the time of night and darkness, thus perhaps spiritual time - the word ‘aura’ also includes the meaning of ‘breath’ in addition to that of ‘atmos- phere’. Sometimes the painting looks like faded black and white photograph, which corresponds also to the thematic consciousness to summon the history and evoke the memory. So, the artist paints a phenomenological landscape where light and darkness contrast or mingle, even more completely in the absence of color.
Earth, water, fire, air. The blaze is wavering on the surface of the water (water and fire). An uncontrollable flame burning wild grass spreads out (earth and fire). Smoke rises in the background (air). The firecrackers explode crossing the darkness, and those sparks disappear into darkness (fire and air). Some of the remains of the firecrackers fall on the water (again, water and fire). The artist, who summoned history to accuse the violent reality that keeps returning and evoked the reverse of the landscape, in other words ‘the other’ of the landscape by the medium of the nocturne landscape, focuses in her recent works on the element, phenomenon, substance itself that appears in the nar- rative, such as historical narrative, narrative of night, in other words narrative of darkness. Could we say that the axis of her thematic con- sciousness moved from narrative to structure material of narrative? Or that the center of the gravity moved from macroscopic perspective to microscopic perspective? It seems to be a natural evolutionary process of thematic consciousness, which preserves the mutually organic relation and consistency. That perspective is paying attention to the elements, the materials of earth, water, fire and air. Then as we know well, earth, water, fire and air are known as the original material of the universe and the first elements. The myth regarding the original ma- terial doesn’t differ in East and West, which allows us to expect the future works of the artist, who is attracted keenly to the archetypical im- ages which are the origin of all beings, would open to ontology and dig further into the archetypical image of beings.
Myth. Myth is story. Story of stories. It is an archetype from which all stories are derived, thus an archetypical story. In the archetypical story, the archetypical image is contained (Archetype of Carl Jung). And archetypical material is contained (Material Imagination of Gaston Bachelard). Why do life and death circulate, why does existence exist? The reason is preserved there. How is life a part of death and is death a part of life, how does material become spirit and how is spirit reverted to material? The answer awaits there. Like spirit has its logic, material also has logic (Logic of Sensation of Deleuze). It is an answer than can be obtained through material, or body. I came to think there may have been some other reason why the artist painted the night, which is the half of the landscape, white horizon shining like a flash (or a certain revelation) across the pitch-dark ocean, black surface of water gushing out white foam of spume, and the firecrackers perishing into darkness after momentary glow. I also imagine that the artist would possibly paint someday the darkness itself by medium of material, beyond the material (so perhaps senses).

강유정: 발현發玄 (2019)
박천남

강유정의 회화는 기억저편으로 사라진 이런저런 역사적 사실과 사회적 사건의 상흔을 현재적 시점과 관점으로 환기하고 떠내려는 지적 노력이다. 세상의 시선과 관심으로부터 생략되어있거나 소외되어 있는 심리적 변경, 혹은 물리적 지형을 예의 끄집어내고 들여다보려는 예술적 실천이다. 생활 주변에서 흔히 만나고 경험하는 지형과 그곳 시공에 잠복되어 있거나 서려 있는 어떤 기운, 혹은 흔적들을 채집하고 확인하려는 미학적 관심과 반영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관심과 작업 충동은 역사 서적이나 다큐 등 다양한 자료와 기록물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나아가 사건 현장에 대한 꾸준한 답사를 통해 간접적인 이해와 경험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지속적 실천의지로 이어지고 있다. 강유정의 차분하리만큼 내밀하고 진지한 호흡은 산과 들, 하늘, 바다, 바위 등 대자연의 주요 지형물을 대상으로 발화한다. 휘몰아치듯 이들 대상물에 거칠게 부딪거나, 자연물을 힘 있게 비집고 출몰한다. 때론 리드미컬하게 반복하며 주변을 맴돈다. 살아 꿈틀거리고 있음이다.
자연에 돌출하듯 존재하는 이질적인 인공구조물과 화면 도처에서 하얗게 타오르는 뜨거운 기운은 대상에 투영, 잠복되어 있는 어떤 사건의 내밀한 기운, 이를테면 응어리, 한, 영혼 등으로 보이기도 하고 사건의 역사적 존재, 혹은 정신 나아가 앞으로 도래할 사태의 징후, 일종의 전조와도 같은 상징존재로 읽힌다. 작가 자신이 만난 설화, 에피소드, 사건 등의 근간인 영혼이나 정신이 공감 가능한 생생한 화법으로 발현되고 있음이다.
크고 작은 화면, 때론 프레임이 없는 대형화면 가득 전면적으로 배어 있는 강유정 특유의 끊임  없는 성취동기와 작업의지는 그의 작품을 접하는 이들에게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떤 장면과 사건 속에 함께 하고 있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먹그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유연한 강유정의 회화술이 섬세하고 따스한 숨결과 함께 화면 구석구석에 스미어 쉼 없이 공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유정의 회화는 풍경이다. 실재하는 대상이요, 자연이지만, 그것은 실제 풍경과 사뭇 다르다. 강유정은 다시점, 복합시점으로 실존하는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임의로 병치하거나 해체, 재구성했다. 이질적인 사물을 슬쩍 화면에 개입시키기도 했다. 시선을 분산시키는 동시에 대상의 맥락을 정치적으로 강조하는 의도적, 역설적 포치로 보인다.
강유정은 관찰자, 목도자로서 화면과 대상의 눈높이 아래에 위치하기도 하고 때론 하늘 저 멀리에서 부감으로 내려다보기도 한다. 고정된 시선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여러 관점과 시점, 장소에서 바라보고 경험한 대상과 지역을 한 화면에 동시에 표현하고자 했다. 학습된, 관성적인 풍경시선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사건을 기억하고 그것이 자신의, 우리네 기억 속에 투영되어 자리매김하는 방식에 대해 주목하고 추체험하고자한 흔치 않은, 쉽지 않은 태도이자 방식이다.
강유정의 관심과 방식은 대부분 검은색을 주조로 이른바 발현發玄한다. 강유정에게 있어 검은색은 대지의 색이기도 하고 모든 색을 끌어안는 지적인 색인 동시에 포용의 색이기도 하다. 소외의 감정과 아픔을 숙명처럼 묻어버리고 삭이며 익명화하려는 자의적 억압기제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대상과 사건에 대한 작가 자신은 물론, 관객의 집중도를 강화하는 효과와 함께 화면에 출몰하는 이런저런 존재와 해방의 기운을 강조하는 이중의 효과도 있다.
주재나 소재 측면에서 다분히 서사적일 수 있는 강유정의 작업이 무겁고 버겁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의 검은색이 균일한 하드블랙이 아니라는 측면도 있지만, 오일이 화면 내 균형을 잡아주는 절묘한 회화적 파트너로 작용하며 자칫 엄숙하고 딱딱하게 경직될 수 있는 화면을 보다 유연하고 서정적인 인상으로 완화시켜주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최근 들어 강유정은 청색조의 화면을 비중 있게 실험, 구사하고 있다. 검은 색조의 모노톤 화면에 익숙해서 일까, 기존의 블랙톤의 작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쾌하고 투명한 느낌이다. 다만 대상이 먼저 눈에 들어오기보다는 바뀐 청색, 아니 색보다는 색과 색 사이로 드러나는, 특히 여백부분에 두드러지는 기름진 면이 우선 눈에 잡힌다. 화면을 꽉 채우는 기왕의 과감한 호흡으로부터 이른바 여백을 허용하며 부드럽게 힘을 뺀 탓일까. 오일의 비율을 효과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강유정의 회화/풍경은 현란하고 요란한 손재주와 붓질로 화면에 이들을 부리고 얹어낸 훈련된 주술행위라기보다는 대상의 물리적 상처는 물론 그 속에 잠복되어 있는 심리적 상흔을 접신하듯 자신의 영육으로 빨아들이고 녹여낸 독특한 ‘아니마anima’적 심리지형이라 하겠다.
강유정은 오들도 몸을 움직여 잃어버린 기억과 시간을 찾아 나선다. 작업실과 학교 주변의 지형으로부터 시작한 애지적愛智的 관심과 실천은 최근 제주의 시공과 사건으로 이행하고 있다. 천혜의 자연 환경 속에 내장되어 있는 상흔과 식민잔재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떨림과 울림을 또박또박, 혹은 미끌미끌한 특유의 작업으로 발현發玄시키고 있다.
남겨진 흔적과 잊힌 사실 등으로 뒤엉킨, 기억 속으로 ‘버려진 풍경’, 인식으로부터 ‘소외된 풍경’을 접하고 확인하며 사건의 시공을 추체험하듯 따라 들어가는 강유정의 검고 푸른 작업은 이른바 ‘그려진 르포르타주reportage’라 하겠다.
©2024 Kang Youjeong